statement
작가노트 (2022)
불과 물은 오랫동안 작품에서 다양한 변주를 이루며 등장한 모티브이다. 두 원소 이미지는 풍경 너머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게 했다. 특히 그것에 투영되는 모순된 상징은 풍경에 신화적 상상력을 더하며 초월적 세계를 생각하게 했다. 타오르는 불꽃에 밝음과 어두움에 생명과 죽음이 중첩되었다. 무한하게 반복되는 파도의 굴곡은 자연의 반복과 순환을 떠올리게 했다. 들불이 지나간 후 새롭게 피어나는 들풀, 물방울이 순환하여 바다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했다.
이러한 상상은 일상적이며 평범한 것에도 번져 주변의 하천과 수풀, 해변의 불꽃놀이와 작은 스파클라에까지 시선이 미쳤다. 불꽃과 파도 너머로 정신적이며 초월적 세계를 그리는가 하면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지를 통한 몽상과 명상 사이의 유영(游泳)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나아가 자신을 돌아보고 대화를 거는 것이다.

반짝이는 점 Shining Dots (2021)
가끔 유난히 크고 하얗게 반짝이는 별이 있다. 가장 밝은 별의 별자리를 쫓으려 하지만 별자리표에 그려져 있지 않다. 새로이 생긴 별이라도 되는 것일까. 누군가는 사실 그건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이라고 했다. 목성과 화성, 시리우스, 베가, 오리온자리, 그리고 인공위성이 밤하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밝은 별인듯 하다. 1957년 이후 지구궤도에는 인공위성이라는 새로운 별들이 떠올랐는데, 이들 무리는 무려 9천여개라고 한다. 어떤 이는 별을 찾아 떠나는 꿈을 꾸며 무수히 많은 별을 쏘아 올려 앞으로 1만여개의 인공위성이 더 떠오른다고 한다. 그러나 인공위성이 하늘을 가득 덮으며 별을 가리고 빛을 반사하여 진짜 별을 보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게다가 이들 인공위성 중 60여개가 궤도를 이탈했다고 한다. 앞으로 더 많은 인공위성이 궤도를 벗어날 것이고, 우주 쓰레기가 되어 별처럼 우주를 헤맬 것이다. 

화가의 이젤 Pictor (2021)
예로부터 별자리는 하늘의 희고 빛나는 별무리를 연결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함께 하늘을 보며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그렸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었다.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 카시오페이아가 하늘에 박혀 있다. 근대에 이르러 망원경이 발달하며 밝은 별 사이의 어두운 별까지 보게 되자 새로이 이름을 부여받은 별자리도 있다. 작은 여우, 작은 사자, 화가, 조각칼, 현미경 등이다. 화가자리는 18세기 프랑스의 라카유가 이름 붙인 별자리로, 본 명칭은 화가의 이젤이었다고 한다. 비록 별자리에서 이젤의 형상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모두가 별자리의 이미지와 서사를 만들어가는 시대에서 누군가가 별을 찾고 이름을 붙이는 시대로 변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별에 자신 또는 흠모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붙인다. 별을 잇고 그림을 그려 별자리를 만들기보다는, 별을 사서 이름을 붙이거나 토지를 구입하여 소유권을 주장한다. 물론 우주조약에 따라 우주 공간은 누구의 전유물도 될 수 없으므로 별에는 소유권이 없다고 한다.

말뚝 (2018)
군사시설이 포함된 풍경을 공공연하게 사진 찍거나 작품으로 묘사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제한받는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군사기지법이 적용되는지 알 수 없기에 산에 오른 자는 스스로 행위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나는 행위가 통제되는 범위를 알 수 없어 스스로 광범위하게 행위를 제한하게 되는 것에서 부자유와 불편함을 느꼈다.
군사시설은 말뚝이나 표지판, 울타리 등을 통해 그 경계를 표시한다. 나는 여러 지표 중에서도 말뚝에 주목한다. 말뚝은 수직으로 땅 위에 세워짐으로써 장소를 구분하는 지표의 기능을 한다.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고 경계를 나누는 울타리 일부가 되어 행위를 제한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에 놓여있는지 알 수 없고 심지어 크기도 작기 때문에, 우연히 마주칠 수는 있으나 일부러 찾기는 매우 어렵다. 운 좋게 말뚝을 발견하더라도 대다수는 누군가가 지키고 관리하지 않다보니 낡고 도색이 벗겨져 있다. 때로는 무성한 수풀이 가리고 있거나, 쓰러지고 뽑혀 있기도 하다.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말뚝은 경계를 알리는 기능을 정확히 수행하지 못한다.

섬 (2018)
쓸모를 잃고 파도에 마냥 부딪히는 초소의 사진을 보았다. 누구도 지키지 않아 버려진 초소는 이미 기능을 잃고 쇠락했음에도 지도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버려졌지만 보여서는 안 되며, 이미 기능을 잃었지만 존재함으로써 기능한다. 
사진과 같은 곳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제주도에서 뜻밖의 장소와 마주쳤다. 근현대사의 흔적이 삶의 터전을 가로지르며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야기하지 않아 잊히는 기억은 땅에 남아 도로 한편에 밭 한가운데에 널브러져 있었다. 덤불 속에, 오름 위에 가려져 있기도 했다. 
오랜 아픔의 역사는 현재까지 반복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이어진 아픔은 100년 전에도, 5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그 시대의 방식으로 유효하다.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던 아픔은 직접 땅을 밟음으로써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은 중심으로부터 분리되어 가장자리에 위치한 ‘섬’이다. 섬은 항상 중심에 의해 분류되며 소외된다. 섬은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뭍에도 있다.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모든 변두리의 장소들이 섬이다. 
나는 중심으로부터 따로 떨어진 장소들에서 가장 소외된 기억을 발견하고 들추어본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변화를 기약하며 불을 붙여본다. 이것은 마치 오름의 들불놓기와 같다. 땅을 휩쓸고 지나가는 불길 너머로 새로운 변화의 불씨를 찾아본다.

경계의 가장자리 (2017)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내가 보는 도시의 풍경은 매일 빠르게 변화하는 풍경이다. 모든 풍경이 끊임없이 새롭게 쓰이고 지워지고 그 위에 덧칠해진다. 새로 닦여 개통을 앞둔 길. 어느덧 완공되어 입주를 기다리는 새로 들어선 아파트. 어디선가 자라서 옮겨졌을 새롭게 심어진 나무들. 땅 위에서 새롭다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서 역사를 이루어 왔다는 것은 욕망을 실현하는 역사이다. 그러나 욕망에는 층위가 존재하여 때때로 다른 이에게 아픔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의 욕망은 늘 새로운 욕망에 밀려 또 다른 아픔이 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도시의 주변부에는 그러한 욕망의 층위가 사라진 곳이 있다. 도시와 자연의 경계를 가르는 땅,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땅 –‘산’이다. 산은 모든 땅의 경계인 동시에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지는 곳이다. 사람의 욕망은 경계의 끝자락까지 뻗어 이곳 저곳에 흩뿌려졌지만, 산 위에서는 깊이 새겨지지 못한다. 사람이 남긴 어떠한 흔적도 산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산의 거대한 시공간 속에서 사람의 욕망은 그 층위가 사라지고 경계가 허물어진다. 매우 느리지만 아주 활발하게 모든 것의 전복과 순환이 일어난다. 그래서 산은 가장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이자 모두에게 가장 평등한 곳이며, 모든 것의 순환이 시작되는 곳이다.
산을 올려다보고, 오르고, 올라서서 내려다보고, 다시 산을 내려오는 여정은 사람이 남기고 간 욕망의 역사와 마주하게 한다. 산에서 발견되는 사람의 역사는 욕망의 흔적이 쌓이고 지워지며 그 위에 새로운 흔적으로 덮이는 전복과 순환의 역사이다. 산에 오르는 이는 높고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사람의 흔적들을 확인하고,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봄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나는 산에 오르내렸던 다른 이들의 행적을 쫓는다.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 보기도 하고, 멀리서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지켜보기도 한다. 그리고 회화를 통해 산 속에 감춰져 있던 그들의 욕망의 흔적들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이 과정에서 나는 회화로써 가능한 다양한 층위의 역전을 시도한다. 비워내거나 태우고 증발 시키는 등의 변화를 꾀하기도 한다. 화면 속 산 위의 ‘사건’들은 회화를 통해 땅 위에서의 사람의 역사가 역전 되는 순간들이다. 나는 가장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산에서의 역사와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주변의 땅에서도 새로운 역전의 가능성을 기대한다.

땅-산 (2017)
땅은 사람이 발을 딛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 떠나지 못하는 곳이다. 사람의 배경이자 삶의 시작점이며 종점이 되는 곳이다. 또한 땅은 모든 대상과의 관계 맺음이 가능한 곳이다. 생과 사, 관계 맺음, 무엇이든지 가능한 곳에서는 그로 인해 역사가 생겨난다.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결과나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땅에도 새겨지는 것이다. 역사는 유물과 유적으로 가시적인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기억이라는 비가시적인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리고 땅에서는 그 모든 역사의 흔적이 가능하다. 어떤 땅은 그 흔적을 거세당하기도, 그 흔적으로 인해 존재 가능하기도 하다. 어떤 땅은 퇴적층처럼 역사가, 기억이, 그 흔적이 축적되기도 한다. 으레 대부분의 퇴적층이 그러하듯 역사의 층은 표면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그 아래에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다.
우리 주변의 땅은 대부분 도시로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은 도시 한 가운데에서 그들의 땅에 대한 욕망을 실현한다. 그 욕망은 대개 모순으로 가득하다. 존재하지 않는 자연을 느끼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재현을 시도하며,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서 도시를 역사적 장소로 전환시키려고 시도한다. 
그 속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도시와 자연의 관계, 과거와 현재의 관계의 사이에 놓여 있는 땅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되는 땅은 바로 도시 한 가운데에 위치한 ‘산’일 것이다. 산은 그 역사가 사람의 역사보다 오래되어 언제나 ‘그 곳’에 있어왔다. 그리고 그 곳에는 층층이 사람의 역사가 새겨졌다. 사람은 넓고 높은 산 위에 역사를 이곳 저곳에 흩뿌려 놓았다. 산에서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이 도시, 이 나라가 어떠한 곳이며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내가 누구인지 실감한다. 나는 산에서 이 도시의 크기를 실감하고 얼마나 많은 타인이 있는지 실감하고 얼마나 많은 삶의 양상이 가능한지 실감한다.

작가노트 (2015)
2013년 2월, 서울 종로의 인왕산 아래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는 그동안 세상을 바라보던 일관된 시각이 변화하게 된 우연한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인왕산을 비롯하여 서울시 곳곳에서는 조성 및 복원 작업이 마치 유행처럼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곳들은 성공적으로 복원되어 자연을 그대로 살린 모습을 담고 있는 듯 보이며 시민들 또한 자연의 모습을 살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러움이 아닌 인위성이다.  나는 자연의 모습을 닮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을 자연 그 자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며 현대 도시 공간 속에 재현된 자연의 인위적인 속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 속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의 대표적 속성인 해체, 변형, 재조립 등을 회화로 옮기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다양한 시도 속에서 동일한 공간을 유사한 방식으로 바라본 진경산수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작품의 베이스에 끌어오게 되었다. 겸재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한 진경산수화 작품의 표현방식이 내가 해석한 현대 도시 공간 속 자연의 발생양상과 닮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8세기 진경산수화풍을 좇는 화가들의 풍경화에서는 서양 회화에서 발견할 수 없는 원근법과 공간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었으며 이는 현대 서울 공간에서의 자연을 둘러싼 공간의 해체와 재조립의 속성과 닮아있었다.
이러한 관심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나는 인왕산을 중심으로 서울의 다양한 자연 공간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해석, 재조립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인왕산을 소재로 선택하게 된 것은 진경산수화의 영향만은 아니다. 내가 직접 거주했던 공간이자 서울에 대한 애정을 대변할 수 있는 나만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울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인왕산은 문명의 공간인 서울보다도 오래되어 인간의 역사를 초월한다. 인간은 그러한 인왕산이라는 공간 위에 스스로 다양한 지물을 통해 역사를 축적해왔으며 이는 많은 이야기를 낳게 했다. 이것이 바로 인왕산이 서울을 이야기 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도시 공간인 서울이 어떠한 공간인지 정체성을 밝히고 앞으로 어떠한 역사를 갖게 될지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 보고자 서울의 산을 조형 언어로 이용하여 회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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